이렇듯 1941년 이후의 '대동아 전쟁'이 침략 전쟁이었는지 아니면 해방 전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다양한 견해를 수반한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 제1차 세계대전(1914), 만주사면(1931), 중일전쟁(1937), 대동아전쟁(1941) 등의 전쟁들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친 일본의 근대사는 아시아 지역에서의 전쟁의 역사였으며 또 한편으로 식민지 획득의 역사이기도 했다.
정당한 이유도 없이 다른 나라의 주권을 짓밟고 그 나라를 종속시키는 것을 '침략'이라고 정의하고 그 반대를 '해방'이라고 한다면, 그간의 전쟁은 침략 전쟁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청일, 러일전쟁은 청 제국, 러시아 제국과 패권을 다투었다는 의미에서는 침략 전쟁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한국이나 중국의 주권을 짓밟았다는 의미에서는 확실히 침략전쟁의 요소가 농후했다.
또한 '대동아 전쟁'은 일본이 서구의 식민지를 공격했다는 의미에서 그 이전의 전쟁들과는 다소 성격이 다르므로 시노부 세자부로와 같이 주장할 여지도 충분하지만, 지배 방식이나 내용면에서는 기존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일본 사이에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p10~11)
* 대동아 전쟁 : 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정부의 호칭
대만의 식민지화
- 청일전쟁으로 대만을 할양받은 일본은 1895년 5월, 군대를 대만에 파견하여 점령 작전을 개시했다.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었음을 안 주민들은 같은해 5월에 대만민주국을 수립하여 일본의 침공에 대비했다. (p18)
- 청일전쟁 : 시모노세키 조약(1895)
러일 전쟁과 식민지 세력권의 확대
만주와 조선의 이권을 둘러싼 러일의 대립은 1904년 2월에 폭발하여, 쌍방이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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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가 교섭된 장소는 미국의 포츠머스였다(포츠머스 조약). 이 조약에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감독권을 인정받았고, 뤼순,다롄의 조차권, 뤼순-창춘간의 철도 및 그 부속 권익, 북위 50도선 이남의 사할린을 획득했다.
러일 전쟁이후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은 것도 영국과 미국의 승인하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은 1904년에는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일본인 고문으르 한국정부에 파견했고, 이듬해의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에서는 외교권을 획득하고 새로 통감부를 설치하여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취임했으며, 1907년 제3차 한일협약(정미조약)에서는 내정권을 손에 넣어 한국정부의 주권을 빼앗았다. 이 또한 영국,미국,러시아의 양해하에서 이루어졌다. (p27)
특히 식민지에서는 쌀 생산량을 늘려서 저렴하게 일본으로 들여오고자 했다. 일본에는 1918년에 일본 민중들이 쌀값 폭등에 항의하여 쌀 소동을 일으켰는데, 도야마현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일본 정부로서는 이와 같은 움직임을 방지하고, 노동자의 저임금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조선에서는 1910년대에 토지 소유권,지가,지형 조사를 목적으로 토지 조사 사업을 시행한 후 1920년부터는 이를 기초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했고, 1926년부터는 다시 산미증식 갱신계획을 수립했다. 결과적으로 1920년부터 1930년 까지의 10년동안 조선의 쌀 생산액은 1.1배밖에 증가하지 않았지만, 반출액은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른바 기아 수출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만에서도 유사한 정책이 전개되었다. 1922년 이후 일본시장을 겨냥해서 신품종 봉래미를 도입하고 보급하려 한 결과 1920년부터 1930년까지 대만의 쌀 생산액은 1.5배, 반출액은 3.1배 증가한 것이다. (p47)
만주국설립 (1932) : 마지막 황제 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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